“바로 실행할 수 있는, 내용을 바로 보여 줄 수 있는, ‘완벽하게 준비된 수첩’이 있나요?”라 말한 정연두 작가의 말이 나를 지금 이곳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완벽하게 준비된 수첩’이란 자신이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때 프로젝트 진행을 위한 디테일한 내용부터 예산까지 완벽하게 적힌 노트를 뜻합니다. 완벽 수첩은 늘 가지고 다니다가 누군가가 그 프로젝트에 대한 예산을 줄 테니 지금 당장 실행할 수 있느냐고 물을 때에 바로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시작합시다”라고 내밀 수 있는 그런 알라딘 요술램프 지니 같은 거죠. 아, 수첩은 요술램프겠네요. 지니는 후원자고.

대학원 졸업전시의 일환으로 《매우 성공적인(very successful!)》전을 오픈했을 때였습니다. 지금은 유명한 아티스트이지만 정연두 작가님도 그 당시에는 미술계에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정도였죠. 졸업을 앞두고 매우 성공적인 전시란 과연 무엇이며, ‘성공적인’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기 전에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 대학원생들에게 미술계 안에서의 ‘매우 성공적인’에 대한 궁금증은 당연한 것 아니었을까요?

꿈을 이루는 수첩이야기를 해준 정연두 작가님다운 작업이죠?

정연두 작가님을 초대해서 대학원 졸업을 목전에 둔 학생들에게 해줄 말은 어떠한 것이 있는지 등 자유주제로 강의 요청을 드렸습니다. 인터뷰 형식의 질문도 했던 것 같네요. 기억은 자세히 나지 않지만 무척 순수했던 질문들 같아요. 요즘 대학원생들을 만나면 제가 이런 저런 것들을 묻기도 하는데요. 마흔 넘은 제가 들어보면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근거 없는 질문들일 때가 많거든요? 하지만 정말 성실하고 진지하게 답변을 하곤 해요. 왜냐하면 당장에야 그가 하는 질문도 내가 하는 답변도 동문서답처럼 도움이 되지 않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문득 그 순수한 질문과 그 질문에 최선을 다해 답하는 선배의 대화는 램프 속 지니처럼 힘을 발휘할 때가 있더라고요. 먼지가 잔뜩 묻은 알라딘 램프도 뒤늦게 발견되잖아요. 심지어 그 안에 지니가 있는지도 모르고요. 딱 그 동화 속 내용 같아요.

아무튼 그때 완벽하게 준비된 수첩에 대한 이야기를 정연두 작가님이 해주셨는데 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더라고요. 졸업과 동시에 큐레이터로 취업해 업무를 익히면서도 늘 완벽하게 준비된 수첩은 내 마음속 가장 구석에 조그맣게 있었어요. 심지어 아주 오랫동안 단 한 번도 내 수첩을 만들 시간도 정신적 의지도 없었습니다. ‘저런 수첩이 있어도 사용할 수나 있겠어?’ ‘대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도대체 뭘까?’ ‘수첩을 만든들 나 혼자 감당할 수 있겠어?’ ‘내 수첩 내용은 상상만 해도 별로군, 것 참 잘하는 게 없어’하면서 십여 년이 흘러갔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이를 낳고 아이 그림을 아카이빙 한 후 마음속에서 드디어! ‘어라, 책을 만드는 계획이 들어간 수첩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이 스치더라고요. 다음은 금방 십여 년간 익힌 노하우가 들어간 수첩이 뚝딱 만들어졌어요. 아카이빙 자료와 대략의 목차, 디자인 리서치, 제작 기간 등 상상의 시나리오 속에서 상상 속의 책이 모습을 드러냈어요. ‘와- 내가 지니 만난거야? 아니지, 내가 지니를 창조한 거야?’하면서 혼자 신나서 웃었어요.

그 이후에 어떠한 일이 있었을까요?

“뭐 책? 지형 씨는 뭘 쓰려고 하는데? 들어보자 궁금해.”

하며 엉뚱한 기회가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대화를 나눈 출판 관계자(너무나 뜬금없는 장소에서 만난 엉뚱한 인연이었습니다. 서로의 배경도 몰랐고요)는 추진력이 엄청난 사람이었죠. 그 분은 해외의 책을 소개하는 유명한 에이전시의 대표였답니다. 그는 다음날 바로 출판사와의 미팅을 잡아주었어요. 하룻밤 안에 회의를 준비하기엔 역부족이었겠지만, 저는 이미 수첩이 있었기에 미팅과 출판기획 회의는 성공적으로 마쳤고요.

일단 시작하기

감성작가는 자기 계발서를 자주 읽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에 서면 늘 1, 2위를 다투는 책들은 자기계발서인 경우가 많기에 손에 쥐고 펼쳐 보죠. 이런 장르의 책은 책 내용이 다들 비슷비슷한데 항상 공통적으로 나오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무조건 시작하라 -> 중간 목표를 점검하라 -> 마지막 목표에 끝까지 완주하라 뭐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 말이 왜 자꾸 반복되겠습니까? 너무 당연한 소리지만 그렇게 하면 꼭 목표가 이루어지니까요. 그러니 우리도 한번 복습해보고 따라해 봅시다.

일단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무엇이든 씁시다. 무엇을 쓸지 모르겠다면 필사를 해도 좋고, 미운 사람 욕을 써도 좋습니다. 나만 보는 글인데 어때요. 무엇이든 그 무엇이든 써보자는 말입니다. 일단 시작하라지 않습니까.

글쓰기를 바로 시작하기 힘들다면 세상에는 다양한 끄적이기 방법이 있죠.

중간목표

다음으로 중간 목표를 세워봅시다. 내 마지막 목표는 책을 내겠다고 생각하고(어이없어 하지 말고요. 꿈은 크게 꿔야 그 반에 반만큼이라도 이루어지니까요)중간 목표로 가볍게 뛰어 넘는 허들을 세워두는 것입니다. 자, 아무거나 쓰는 시간이 지났다면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떻게 쓸 것인지, 언제 어디서 쓸 것인지 정도를 정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목차를 구성해보기 시작합니다. 내가 무엇을 쓸지 정했으니까요. 목차 구성을 여러 번 바꿔 보는 거죠. 목차를 세우다보면 참고문헌이 필요할 수 있죠. 읽어야죠. 많이 많이 읽다보면 내 목차가 형편없이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고쳐야죠. 한 번 고치고 두 번 고치고 나면 훨씬 목차가 나아보입니다. 목차가 고쳐졌으니 중간 목표를 새롭게 세우게 되고 또 다양한 책들을 읽어야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의 수첩은 단단해 지기 시작합니다. 목표가 구체적으로 되며 꾸준히 쓰기는 계속 되고 있는 거죠.

책을 내겠다는 마지막 목표

무조건 시작해서 다양한 중간 목표를 거쳐 드디어 마지막 목표에 도착합니다. 이 목표에 도착할 즈음에는 원고의 틀 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가득 찬 참고문헌의 지식은 물론 출판 시장 전반에 대한 지식도 동시에 쌓여있죠.

당장 책을 낼 출판사를 찾지는 못하더라도 브런치나 다양한 채널을 통해 그간의 창작 결과물을 세상에 펼쳐봅니다. 웬만큼 마지막 목표에 도착해 있습니다. 꾸준히 쓰는 힘을 기르는 법은 이렇게 시작, 중간목표, 책을 내겠다는 마지막 목표로 마무리 될 것입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예술서를 발행하는 감성작가는 갑자기 씁쓸합니다. 이래서 자기계발서는 베스트셀러가 되고 감성작가 책은 세상 속에서 허덕이나 봅니다. 저는 꾸준히 쓰는 힘은 갖추고 있으니 중간 목표를 더 많이 정해봐야겠습니다. 접근 가능한 예술교육을 꿈꾸는 마지막 목표는 너무나 거대하니 중간 목표를 자잘하게 세워봐야겠어요.

이 핑계로 수첩하나 구매하러 가야겠습니다. 예산까지 빡빡하게 세워두면 후원자가 쑥 하며 나타날까요? 후원자가 나타난다면 바로 실행할 것들이 머릿속에 명확하게 한두 개 있거든요. 거뜬하게 마무리 할 자신도 있고요. 그리고 정연두 작가님은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도 궁금해요. 제가 이제 그 젊은 시절 작가님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매우 성공적인’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마음속에 품고 있고요. 작가님은 지금 그에 대한 답을 어떻게 하실는지요?


꾸준히 쓰는 힘을 기르는 법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행위가 실제로는 그 일을 해내지 못할 가능성을 높인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의식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려는 것보다 무의식적으로 그 행위를 하게끔 만드는 것이 실행가능성을 높인다는 이야깁니다. ”그냥”글쓰기에 적용해보죠. ‘글쓰기를 해야겠다!’라고 마음을 먹고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해도 글쓰기를 꾸준히 해나가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별 노력 없이도 글쓰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