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흐릿한 점을 먼저 보여주면 그 점에 갇히겠지만 예시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머릿속 흐릿함의 강도는 모두 다를 거예요. 자신이 생각하는 흐릿함을 자신 있게 표현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글로 써서 상상하게 합니다.” - <흔들리는 선> 6p

저는 글쓰기와 드로잉에 처음부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큐레이터 생활을 하는 동안은 문서작성만 했지 글다운 글을 써본 기억이 별로 없고요, 드로잉도 학부를 졸업한 이후에는 재료를 꺼내본 기억이 손에 꼽힐 정도거든요. 하지만 드로잉 안내서를 쓰기 위해 아카이빙을 하면서 다시 드로잉을 시작했고 그 기간은 8년 남짓 됩니다. 드로잉이라고 해서 뭐 대단한 스케치를 한 것은 아니고요. 갖가지 재료로 신나게 선을 긋고 색을 입히는 정도였습니다.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한 것은 5년 정도 되는데, 드로잉보다 글쓰기에 훨씬 노력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이렇게 그리기와 글쓰기를 병행한 시간이 겹치다보니 그리기와 글쓰기가 맞닿은 지점 또는 다른 점을 느낄 수가 있어요.

드로잉과 글쓰기의 공통점


드로잉과 글쓰기의 공통점은 바로 ’상상력‘입니다.

- 글쓰기의 상상력

영상은 즉각적으로 보고 바로 느낄 수 있는 장르라면 글쓰기는 느리지만 무언가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상상력을 끌어내기에 더 없이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특히 정답이 없다는 것이 매력적인 공통점인데요. 가령 제가 흐릿한 점, 번지는 색, 뾰족한 세모, 흔들리는 선을 말해도 각자의 머릿속에는 모두 다르게 그려지잖아요. 느릿느릿한 상상력은 생각보다 제 역할을 톡톡히 한답니다. 만약 제가 먼저 흐릿한 점을 보여주면 그 점에 갇히겠지만 예시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머릿속의 흐릿함의 강도는 모두 다를 거예요. 자신이 생각하는 흐릿함을 자신 있게 표현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글이 가진 상상력에 해당될 것 같아요.

- 드로잉의 상상력

그림이 가지는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는 3살 아이도 알 것 같은 내용이지만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면 금방 답하기 어려워요. 저는 떠오르는 답은 많은데 금세 마음에 드는 답을 선택하긴 어렵네요. 제가 생각하는 드로잉의 상상력은 나를 ’바라보는 힘‘ 같아요. 드로잉을 하다보면 일단 잡념이 좀 사라져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보다는 내 손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됩니다. 물론 손을 움직이며 이런 저런 생각도 들지만 화면구성의 다음 단계에 들어서면 그 생각의 꼬리는 잠시 멈추게 됩니다. 뭘 그리지? 어떻게 표현해보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렇게 현실 속에서의 내 생각과 드로잉의 자아는 분리와 합체를 거듭하는데요 그때 ’나를 바라보는 힘‘이 화면에 구성돼요. 여기서 나를 바라보는 힘이 상상력과 같은 단어로 사용될 수 있는데, 화면에 구성된 나무, 풀, 토끼 또는 추상적인 선, 색, 여백 등은 내가 모르는 나를 표현해 놓은 부산물이기도 해요.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또는 글을 통해서 나를 바라 볼 수도 있지만 그건 절대적인 나만의 시간이 아닌 타인의 의견과 생각이 내게 스며든 시간이죠. 하지만 하얀 도화지를 앞에 두고 내 손이 움직이고, 내 생각이 오고 간 흔적을 보면 그 안에 나만의 상상력이 표현되어 있거든요. 그런 것을 미술치료 쪽에서 분석하고 내면을 읽고 상황을 설명하고 하는 거겠죠?

움직이는 손에 의해 탄생하는 '세상에 하나 뿐인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