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적 없는 나의 스승들

너무 피곤한 날 밤새워 완독한 책이 있습니다. (12시 시작, 새벽 3시 47분까지 읽었더라고요.)  낮에는 업무를 위해 읽어내야 하는 책과 처리해야 할 일들 때문에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여유가 없거든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제가 잠을 줄여가며 읽어야지 하고 정해둔 책 중 하나였어요. 제게는 만난 적은 없지만 제가 스승으로 모시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괴테, 칼 필립 모리츠, 파울 클레, 칸딘스키, 로웬 펠드, 발터 그로피우스, 요하네스 이텐, 조지 오웰, 오스카 와일드, 노튼 저스터, 브루노 무나리, 김환기, 박완서, 우치다 다쓰루 그리고 이어령입니다. 나의 스승님이 돌아가셨으니(이어령님에 의하면 죽음은 36억년 + 자신이 죽는 나이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셨고 그래서 죽으면 돌아간다라는 단어가 정말로 멋진 단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그를 기리는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싶었거든요. 컴컴하고 우중충한, 봄인 듯 으슬으슬 사람 아프게 만드는 추위, 도전해야 할 과제가 겹겹이 쌓인 밤 저는 모든 업무를 뒤로하고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펼쳤습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저는 제가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책일수록 지저분하게 읽는 습관을 가지고 있어요. 제 서가 중 정말 깨끗하고 정갈하게 있는 책은 제가 대충 읽다 말아버린 책일 경우가 많고요. 좋은 책임을 확신하고 작정하고 읽을 때는 가장 편안한 복장으로 아무렇게나 누워서 손에 집히는 대충 필기구나 들고 책을 접고 표시하며 읽어 내려갑니다. 내 평생 몇 번 읽을 예정이기에 나만의 표식을 시작하면서요. 펜이 없을 때는 무조건 책 끄트머리를 접어요. 낮에 많은 일을 처리하고 밤이 되어야 그 좋아하는 책 = The 책을 읽을 수 있기에 손에든 아무 필기구로 동그라미를 크게 그리고 아주 좋은 부분 대충 점만 찍으면서 그럭저럭 괜찮은 부분으로 표시를 하죠.

줄 긋는 힘도 없을 때가 많거든요. 줄 긋는 힘도 없을 만큼 괜찮은 일을 많이 하나 보다 오해하면 금물입니다. 제 업무는 주로 노트북을 사용하거나 책을 읽고 앉아 있는 업무지만 주부의 역할은 달라요. 굉장히 역동적으로 흘러갑니다. 가사 노동이라는 말이 왜 있겠어요. 변수도 많고 몸을 움직이는 일이 정말로 많아요. 노트북을 켜고 정적으로(타이핑을 치는 것을 보면 그다지 정적이지 않아요. 가끔 시간에 쫓겨 자판이 부서지도록 칠 때도 많은데요. 옆자리 창작자가 슬그머니 일어나 다른 자리로 가면 나 때문인가 하고 잠시 멈출 때가 있어요. 물어보면 손사래를 치던데 손사래를 많이 친다는 건 진짜 그렇다는 말 아닐까요?)

일하다 아이를 찾는 시간이 가까워오면 제 발은 우아함을 잃어요. 종종 총총 두드드 프셔프셔 걷는 제 모습이 보기 싫고요. 도착과 함께 빛의 속도로 가사 일을 처리해 나가죠. 그러니까 겉으로 보면 무계획처럼 보이지만 생각보다는 체계적입니다. 업무를 보고 발은 달리면서 어떤 순서로 가사 일과 아이 돌봄을 처리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퇴근한답니다. 아, 물론 푹 퍼지는 날도 있죠. 매일 바쁘면 사람이 살 수가 없으니까요. 아무튼 그런 이유로 아무렇게나 집어든 펜으로 책에 마구 긋는 사람이 되었다고 장황하게 늘어놓습니다. 저도 한때는 예쁘게 찻잔을 내려놓고 나만의 독서 연필로 사각사각 표시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말이죠.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빠알간 동그라미를 크게 그린 곳

제 취향이 많이 묻어난 책이지만 라이팅듀오에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으니 생략하고요. 이 책에는 삶에 대한 지혜뿐만 아니라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노하우도 많이 담겨 있었어요. 어차피 모든 것은 한 세트 아니겠어요. 이어령 선생님이 책 내내 강조한 자신의 머리로 생각한 것을 쓰도록 할게요. 우리 스승님은 자신의 생각을 넣지 않고 그대로 요약하는 것을 정말로 싫어한답니다.

이어령님이 말씀하시길 자기 머리로 생각하면 겁날 것이 없다고 거듭 강조하셨어요. 언젠가 바이오 학술대회가 열려서 내로라하는 국내 과학기술 관료가 다 모였는데 정작 메인 스피치는 과학자가 아닌 이어령 선생님더러 하라고 했답니다. 왜 그럴까 도대체 나는 무슨 말을 할까 생각했는데 과학자 앞에서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자는 인문학자와 예술가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조 강연자로 지식만을 이야기하는 과학자 사이에서 한 단계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 즉 자기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면 겁날 것이 없다는 거죠.

이어령님과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라이팅듀오에 발행하는 글은 늘 제 머릿속에서 모두 나옵니다. 그래서 힘이 들 때도 있지만 한번 아이디어가 떠올라 쓰기 시작하면 1시간 안에 완벽하게 끝낼 때가 많아요. 저는 겁날 것이 없는 경지까지는 아니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는 화수분처럼 나올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 그거 하나만큼은 세상 어디에 가도 밥은 먹고 살 수 있겠다는 자부심이 들 때가 많아요. 더해 이어령 님이 말씀하시기를 진선미를 아는 사람은 밥을 굶어도 웃는다고. 의식주만 생각하는 사람은 돈은 더 벌어도 고단할 수 있다고요. (그래서 아이들과 그림을 그릴 때도 너무 좋은 그림을 아이가 그려오면 칭찬 대신 이런 말을 자주 해요. “와...너의 그림이 정말 좋다. 너는 걱정 마 이런 것만 그릴 줄 알아도 죽을 때까지 행복하면서도 스스로 밥은 먹고 살 수 있다.”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자 유산이라는 생각도 하면서요. 워-워- 이어령 님 책을 읽다가 너무 자기 충만에 빠져도 위험하겠죠?

이런 제자의 습성을 간파했는지 이어령 님도 뒤이어 나를 겸손하게 하는 말들을 또 하십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다 실패한 사람이라고 해요. 『갈매기의 꿈』을 쓴 저자는 글을 쓰고 너무 완벽해서 타자기를 바다에 던졌다더군요. 밤에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부러우면서도 웃기고 이 맛에 작가 하지 싶어요. 나는 다음날 쳐내야 할 타자가 너무 많은 사람 중 한 명으로서 그야말로 전형적으로 실패한 작가는 나죠. 이 구역 실패한 작가는 나다!! 이어령님도 자신은 글쓰기에 실패한 사람이라 이렇게 많이 쓰고 죽는다고 하더군요.

The Turin Horse(2011)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스승님의 마지막 수업이 너무나 좋습니다. 나 죽을 때까지 실패의 딜레마로 괴로워할 필요 없이 어차피 실패한 값으로 살 테니까 일단 쓰다 죽으면 되겠군 하는 거죠. 특히, 글 쓰는 사람들에게 죽음도 설명해 줍니다. 메멘토 모리를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글 쓰는 사람이 다음이 있냐며 그냥 쓰다 끝까지 쓰다 죽으면 그게 죽음에 끝까지 도착하는 방법 중 하나라 설명합니다. 사실 이어령님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쓰다 죽을 사람들을 응원 한 거죠. 내가 먼저 가 있을게. 너는 쓰다 오렴. 쓰다 지치면 나한테 와. 스승으로 항상 그 자리에 있을게. “곤란한 일이 생기면 와”

내가 더 나이가 들고, 내가 정말 버텨낼 힘이 생기면 저 말을 제일 많이 해보고 싶어요. “곤란한 일이 생기면 나한테 어서 와” 하고요.

이어령 선생님은 철학자 니체에 대해서도 어찌나 쉽게 설명하는지 몰라요. 니체가 죽을 때 너무 비참하게 죽잖아요. 신이 없음을 이야기하다 채찍으로 맞는 말을 보고 말 목을 껴안고 울면서 “어머니 나는 정말 바보였어요”하고 정신도 육신도 놓고 서서히 비참함 죽음을 마주하는데요. 이 이야기가 바로 <토리노의 말>입니다. 인간에게 섞이기도 싫어했고 말의 비참함에 공감한 니체에게 신은 바로 말이었다는 해석을 이어령 님이 해주는데 그간 니체를 해석한 다양한 철학자들의 수천 마디보다 이어령 님의 몇 줄이 제겐 니체에 대한 나의 견해, 인간과 신에 대한 의미를 알려준 것 같아요.

이어 벨라 타르 감독, <토리노의 말>에 대한 영화도 소개해주는데, 이어령 님 식의 유머를 보여줘요. 심각하게 지루하지만 위대한 이 영화는 미국에서 만들 수 없는 이유를요. 강대국이 만들 수 없는 헝가리 감독 눈에만 보이는 바로 이 영화, 내용을 이미 알아서 보고 싶진 않습니다만 밤새 찾아보고 웃다 울다 한 것 같아요. 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가는 이어령 선생님과의 새벽 밤은 정말로 오묘했어요. 스승님은 이런 나를 아는 듯 칭찬을 써 둡니다. 엉망진창이 얼마나 좋은 것인 줄 아느냐고. 카오스라는 것을 경험하라고. 충분히 카오스 속에 있는 너는 잘살고 있는 것이라고. 그럼요 암요. 제가 지금 ‘엉망’을 작업하고 있거든요.

짧은 글을 필사하자

저는 최근 지인으로부터 두 장의 신문 칼럼을 건네받았어요. 나를 아주 잘 아는 지인은 나의 언니입니다. 나에겐 고흐의 동생 ‘테오’ 같은 존재고요.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하려는 이야기들이 보이면 제게 부어줘요. 정말 너무 고마워요. 정보를 부어주는 것도 고맙지만 내가 정말로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니까요. 나의 글을 진심으로 읽고 내 미래에 무슨 작업을 하고 싶은지를 공유한다는 것, 바로 그 ‘공유’가 지금의 NFT 시장을 들끓게 하는 것인데...사람들은 돈으로 환산된 공유만 관심을 가지더군요.

이동규의 두줄칼럼

아무튼 오늘은 이어령 스승님의 마지막 수업으로 시작해서 필사로 끝낼까 해요.

보통 필사로 긴 글을 쓰려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제가 생각하는 필사는 간단한 것도 무척 좋아요. 특히 아주 간략한 글인데 울림이 있을수록 초고수가 쓴 글일 때가 많거든요. 저처럼 문장이 지저분하게 많은 작가는 세상 초보 작가라고 보시면 됩니다. 두 줄 칼럼을 쓴 경희대 경영대 교수 이동규님을 저는 몰랐어요. 앞으로는 이분 글을 좀 찾아보려 해요. 여러분도 읽어보시고 이 분의 칼럼이 괜찮다면 필사해 봅시다. 타이핑을 통해 필사를 해도 좋고요.

죽을 때까지 실패하는 글쓰기를 하더라도 실패를 잘하는 사람의 글을 자주 봅시다. 그리고 그 실패를 따라해 봅시다. 엉망진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