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봐도 중요한 사람이 앉을 것 같은 의자들은 다 뒤로 빼 버려요. 젊은 사람들이 앞에 앉아야죠. 늙은이들은 맨 뒤로 보내버려요”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많이 웃었던 장면이 있어요.  어느덧 노인이 된 안도 타다오는 자신을 위한 행사가 준비되는 것을 보다가 무대 앞에 있는 의자들을 뒤로 밀치면서 “누가 봐도 중요한 사람이 앉을 것 같은 의자들은 다 뒤로 빼 버려요. 젊은 사람들이 앞에 앉아야죠. 늙은이들은 맨 뒤로 보내버려요”라고 말을 하는 장면에서 제가 웃은 겁니다. 사실 웃겨서 웃었다기보다 뭔가 통쾌하더라고요.

나는 한 번도 그처럼 중요한 사람이 된 적이 없어서 당연한 듯 그런 자리에는 주인공이 앉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서 행사를 준비하는 운영진이었다거나, 저 멀리서 박수 치던 사람이라 그런지 ‘중요한 사람’이 ‘안 중요한 사람’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겠다고 다소 거칠게 어필 하는 안도 타다오는 제가 그냥 나이든 노인이 아닌 ‘원로’란 저런 행동을 볼 때 명명되는 단어겠구나 생각을 했어요. 전후 상황을 모른 채 그 장면만 보고 저는 오해를 한 것일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 잠시 멈춤을 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사회적인 나이

감성작가는 30대 후반에 출판계에 처음 들어왔어요. 그 전에는 오랫동안 미술계에서 일을 했고요. 하지만 그 경력은 출판계에서의 첫 발 디딤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출판 업종에 적응하고 나니 40대 중반이 되어 있었어요. 내 마지막 젊음이 생각보다 조금 남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양한 일을 거절 없이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가끔 이 ‘얼마 남지 않은 젊음’은 시간의 압박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불필요한 허무감을 불러오더라고요. 하나라도 더 열심히 해 보자 싶다가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양가감정에 오락가락 하는 날도 꽤 있거든요.

미술관 벽에 붙어있던 작품 제목입니다. <피곤은 언제나 꿈과 함께>

스탠퍼드 장수연구센터의 연구자들은 시간의 흐름에 한계가 생기면 사람들은 현재를 우선시 한다는 걸 보여줬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놀랍게도 70대인 사람들이 50대나 40대, 심지어 30대보다 더 행복하고 자기 삶에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네요. 중년에 접어들면 자기 내면에 살던 무시무시한 용들 중 일부를 베어 죽이고, 젊은 시절에 생긴 상처들도 상당수 치료된다고 합니다.

행복에 관한 거의 모든 연구에서 성인의 생활 만족도는 U형 곡선을 그리는데, 이 곡선의 왼쪽 윗부분은 꽤 들뜬 기분으로 성인기를 맞이하는 젊은이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친구, 가족, 아이, 재정과 관련된 책임 때문에 본인들 위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지는 20대 후반부터 30대까지는 행복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고 해요. 그리고 중년의 실망감 때문에 갑자기분에 넘치는 상품을 구입하거나 결혼생활이 파탄날 수도 있는 40대에 이르면 행복 수준이 최저점에 도달한다고 하는데 감성작가는 U자 곡선 최저점에 위치한 40대 중반이랍니다. 장수연구센터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면 50대가 되면 기적적으로 지난 10년간 품었던 기대가 대폭 바뀌고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의 우선순위가 재조정되면서 인생에 대한 태도가 조금 나아진다고 해요. 마침내 지금껏 살면서 쌓아온 자신감과 용기, 유머감각을 되찾고 즐기게 되며 나 자신에게 충실해질 능력이 커진다는 겁니다.

장수센터에 대한 내용은 최근 재미있게 읽은 책 칩 콘리가 쓴 《일터의 현자》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장수연구센터의 인생행복곡선 U를 보며 신체적 늙음과 정신의 성숙이 사실관계 아래 공평 할 수 있고, ‘나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어요.

프리랜서의 삶을 살면서 40대 중반으로 느끼는 물리적 한계와 좌절감 그리고 한편으로 염세적인 생각들이 내 나이에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던 거죠. 마치 청소년기에 전두엽 미발달단계인 것을 인지하면 그들이 이해가 가듯 저도 인생행복 ‘최저점’에 있는 나이대이니 ‘그러려니’라는 단어를 더욱 자주 쓰며 사소한 위기를 넘길 알리바이가 미리 짜졌습니다.

비교에서 자유로운 나이

칠순이 넘는 여배우 윤여정이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은 그 이후의 이야기가 TV프로그램에서 방영되더군요. 제목은 <뜻밖의 여정>인데요. 거기서 40대 PD가 질문을 합니다. 40대 윤여정 배우는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다고요. 그리고 지금 40대인 PD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고, 어떤 말씀을 전해주고 싶은지도 묻더라고요. 간단한 요리를 하고 있던 윤여정은 고게도 돌리지 않고 “나도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도 70살이 처음이야”하더군요. 친절하고 달콤한 답변보다 더 신뢰가 가는 답변을 그 자리에서 하는 윤여정은 다음 말을 이어 갑니다. “나는 있잖아. 40대에 일이 너무 급했어. 먹고 살아야 했거든. 그래서 들어오는 일은 다 주워서 했어. 정신없이 했지. 그러니까 니들도 앞 뒤 따지지 말고 다 해 다.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다 해봐. 42살이 처음이듯 60살도 70살도 우리 모두는 처음이니까. 어설프고 고민되는 것은 70살이 되어도 마찬가지거든.”

똑같은 작품도 20살, 30살에 본 느낌과 40대에 보는 느낌이 달라요.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우리는 ‘나이’가 주는 중압감도 즐기고, ‘나이’가 전달하는 깊이를 스스로 칭찬하기도 하며, ‘사회적 나이’에서 받을 수 있는 최저 행복감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도 체험하고, ‘내가 정하는 나이’를 통해 노인이 아닌 원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음악가에게는 은퇴라는 게 없대요. 더 이상 떠오르는 음악이 없으면 연주를 멈출 뿐이죠.” _영화 <인턴> 중 로버트 드 니로의 대사